“나는 지금 지쳐 있고 위로가 필요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박완서 / 웅진]
세상에 ‘싱아’ 였다니?
박완서님의 이 소설이 나온 지 19년 되었다는데 난 지금까지 이 소설의 제목이 ‘그 많던 상아는~’ 으로 알고 있었다. 상아를 누가 먹었을 리는 당연히 없었겠으나 소설적 표현이라 생각했다. ‘아, 상아를 통해 문명에 의한 자연파괴를 경고하려나 보다’ 쯤으로 마음대로 단정 지었다. 그런데 ‘싱아’ 라니?
국민 작가라 불리던 저자의 책을 이번에 처음 읽은 게 화근이다. 내 독서의 한계는 바로 편식이다. 편협함과 당파성이 지나치다는 점이다. 물론 최근의 독서에서는 많이 좋아지고 있으나 여전하다. 이문열, 박완서님 등이 내가 싫어하는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상 평생 심사위원을 맡은 이후로 의도적으로 그들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내가 직접 그의 해명을 접한 바는 없으나 그가 어떤 특정 정파의 입장에서 의견을 피력한 것을 들은 적이 없으니 아마도 [조선일보]에 무비판적으로 협조한 것으로 짐작한다. 하여간 그의 책을 처음 읽다니? 쯧쯧.. 작가에게 미안하다.
‘싱아’는 마디풀과의 풀꽃이라는 데 나도 처음 듣는 식물이다. 잎과 줄기를 생으로 먹으면 상큼한 맛이 난다고 한다. 책 중간에 이 제목이 그대로 한 문장으로 나온다. 저자가 개성의 한 시골에서 태어나 서울의 대학 시절까지를 기록한 성장 소설이다. 자서전인지 소설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작가의 말대로 순전히 기억에만 의존해서 쓴 소설이라고 보아 사실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다. 자서전은 꽤 많이 읽었으나 성장소설로는 황석영의 [개밥바라기 별]이 유일하다.
개성(송도)의 시골 마을 박적골에서 뼈대만 남은 양반 집의 손녀로 태어나 조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저자의 유년 시절이 주된 이야기이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 세칭 [엄친아]로 자라는 과정이 뒤를 잇고, 역사의 요동기인 해방과 한국전쟁에서 저자와 그의 가족이 겪은(아니 우리 모두가 겪은) 힘든 역사가 끝을 장식한다.
박절골에서의 유년기는 잠 낭만적이다. 일제말기의 황폐함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 벽지 시골 마을과 자연이 주는 포근함이 있어서일 것이다. 동무들과 어울려 다니던 동네와 뒷산, 거기에 거의 절대적일 만치 손녀를 사랑한 할아버지가 있어 저자의 유년은 풍요롭다. 이후 풍으로 드러눕는 할아버지와 저자의 정서적 교류는 내내 소설을 따뜻하게 감싼다. 덧붙여 도회물을 먹은 엄마의 현실성, 시골의 따분함과 ‘도토리 키재기’ 의식을 단번에 깨트려 주는 자랑스런 오빠가 있어 저자의 의식은 균형을 이룬다. 단연코 제일의 미덕은 탁월한 기억력과 정직함이다. 작고 세사한 것까지도 꼼꼼하게 되살려 놓은 저자의 기억력은 놀랍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들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심리 분석까지 ‘역시 글쟁이’ 다. 자서전과 성장소설의 가장 큰 함정은 솔직함을 비껴간다는 것인데 저자는 정면에서 다룬다. 일제하의 혼란스런 개인과 가족의 이중성, 해방 정국에서의 좌우 다툼과 그에 휩쓸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그대로 다룬다.
하지만 진짜 내가 놀란 것은 이야기 내내 ‘나의 이야기’가 오버랩되는 것이었다. 저저의 싱아 기억이 나올 때는 개가 어릴 적 친구들과 야산에서 떼로 다니며 따먹던 아카시아 잎이 스치듯 지나가고, 평론가 김윤식의 ‘박완서 문학의 절창’이라 말한 ‘뒷간’ 기억에는 내 어릴 적 풍향동 집 시원한 아랫바람(?)이 좋았던 재래식 화장실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부르고, 큰 숙부와의 투망 경험에서는 나 어릴 적 아버지와 떠난 겨울 낚시에서 오래도록 기억을 머물게 했다. 사람들이 자서전이나 성장소설을 꾸준히 읽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기억과 대면하는 것이다. 읽는 내내 그래서 아팠고 아련했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나는 지금 지쳐있고 위로가 필요하다’고 했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들추어낸 고통이 그의 심신을 괴롭혔을 것이다. 공감이 된다. 그래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아주 뒤늦었지만. 어리고 젊었을 적 겪은 수많은 혼란과 고통을 다시 끄집어서 보여준 그의 용기에 머리를 숙인다. 그래서 대가라고 하는가 보다. 나도 언젠가 나의 성장을 기록해 보고 싶다.
2011. 9. 10. 이장규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7마지막 기회라니-더글라스 (0) | 2012.12.30 |
---|---|
46아내가 결혼했다-박현욱 (0) | 2012.12.30 |
4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고미숙 (0) | 2012.12.30 |
43강남좌파-강준만 (0) | 2012.12.30 |
42미래의 진보-이정무 (0) | 2012.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