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다시 / 비채]
고도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건축학과를 갓 졸업한 사카니시는 유일하게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사무소에 입사한다. 이 설계사무소는 여름 동안에는 도쿄 사무실을 비우고 화산이 있는 외딴 별장에서 지내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그곳에서 보낸 여름, 국립도서관 설계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한 과정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특별할 것이 없는 스토리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디테일 때문이다.
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같이 느껴졌다.
연필 깎기와 단지
짧아진 연필은 기라 홀더에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차면 여름별장으로 옮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모두 자기 자리에서 열 자루 정도의 연필을 손으로 깎는다. 나무가 깎이는 소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작을 준비하는데 적합하다. 연필로 작업하는 건축가도 그렇지만 종일 연필과 숨바꼭질하는 교실 안 교사들도 손 연필 깎기는 제법 그럴싸하다. 더군다나 그렇게 해서 모아진 연필을 과실주 담그듯 유리병에 넣어둔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시간이 맛있는 술을 빚는 것처럼 꾼들의 고집과 열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오늘부로 교실에 연필단지를 가져다 놓았다.
디테일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고 모든 것이 최대한 합리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겨울이 조금 더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올가을은 유난히 예쁘니까.
그러니까 나는 유키코를 눈으로 좇지 않았다. 다만 귀는 유키코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아름다운 문체. 자연을 묘사할 때는 물론이고 건축학 용어를 설명할 때조차 작가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글을 쓴다고 느꼈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로 며칠을 고민했다는 작가 김훈처럼 저자 역시 대강 쓰는 법이 없다. 역자의 번역도 훌륭하다.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일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한 집념의 역자답게 정말 자연스러운 글을 써낸다. 번역을 또 다른 창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매력적인 사람들
설득하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유키코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 스스로 대답을 찾은 듯했다. 작지만 잘 들리는 목소리로 얘기하는 유키코는 상대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쾌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작중 화자인 사카니시의 연애 이야기는 책을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마리코와의 로맨스에 집중하던 부분에서도 유키코는 특별했다. 30년 후에 다시 찾아간 여름 별장, 주인공의 곁에 있던 이가 마리코가 아닌 유키코인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반전이었다.
눈앞의 과제를 하나하나 현실적으로 조립해나가는 가사이 씨 솜씨는 정말 훌륭했다. 쓸데없이 각을 세우지 않고, 밀면 들어가고, 잡아당기면 늘어나는 탄력성이 있었다. 때문에 상대방도 가까이 다가온다.
그래.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일간지의 추천으로 보게 된 책인데, 지난겨울에 읽었던 두 명의 일본 건축가 책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참 좋은 책을 읽었다. 봄을 특별하게 자축하고 싶은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2018년 3월 24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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