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것은 문제가 따르기 마련
[에이번리의 앤 / 루시 모드 몽고메리 / 인디고]
매일 아침 특별한 일이 없으면 5분 정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짧은 5분이지만 이것도 쌓이니 연간 10여권 2,000쪽을 넘는다. 지금은 [클로디아의 비밀]을 읽는 중인데 6학년인데도 무척 기다리는 눈치다. 낭독의 힘이다. 읽어주기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책은 500페이지에 달하는 [빨간머리 앤]이다. 두 달 가까이 읽어야 할 긴 책이지만 아이들은 어느 책보다도 집중하며 듣는다. 주옥같은 표현이 즐비하다. 이 책은 그 앤 시리즈의 속편이다. 앤이 성장하여 고향마을 에이번리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2년을 그린다.
가치 있는 것
마릴라와 함께 쌍둥이 고아 남매를 데려다 키우기가 만만치가 않다. 그 중 데이비는 장난꾸러기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주위의 걱정과 우려에 대해 앤이 대답한다. “가치 있는 일은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죠.” 데이비가 이런 믿음에 반응하며 멋지게 커가는 것은 또 다른 앤을 보는 기쁨이다. 그렇다! 가치 있는 일은 늘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것일진데 너무 쉽게 가지려고만 한다. 좋은 학교, 좋은 관계를 갖고자 한다면 응당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탓하지 않는다 / 박노해
농부는 날씨를 탓하지 않는다 / 농사는 기후가 짓는 것이기에
사진가는 구름을 탓하지 않는다 / 사진은 태양이 그리는 것이기에
시인은 시대를 탓하지 않는다 / 시는 고독이 써가는 것이기에
참사람은 힘으로 일하지 않는다 / 오직 사랑, 사랑이 하는 일이기에
교사는? 나는?
우선 아이들을 탓했고, 동료나 관리자도 한 몫을 했다. 열일곱 살의 초보 선생님 앤은 주위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체벌을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배경이 1908년!) 물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앤은 끝까지 아이들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의 상당 부분은 ‘남 탓’이다. 내가 맡은 아이들의 특수성은 기본이고, 학부모들과 관리자들은 악역을 맡아주어야 한다. 일종의 알리바이나 보험인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것들이 불편해진다. 25년을 가르치고도 남의 탓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모퉁이를 돌면
[빨간머리 앤]을 읽고 서평을 쓸 때가 벌써 2년 전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월, 혼란 속에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앤은 적잖은 위안과 힘이 되어주었다. 길은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며 그곳에서 만난 어려움에 도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던 앤을 보며, 생의 모퉁이도 채 돌지 못하고 진 아이들이 짠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 배는 물속에 있고 진실도 함께 떠오르지 않았다. 망각의 늪에 빠져 어렴풋하던 기억이(아니 양심이) [에이번리의 앤]으로 다시 선명해졌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길모퉁이에 이른 것이었다.(중략) 하지만 앤은 모퉁이를 돌아가려면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을 뒤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만 보고 걷다보니 모퉁이의 앞도, 뒤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이제 곧 반백의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데 아직도 앞가림도 못하고 있으니. 쯧. 특별히 예쁘지도 않은 앤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심을 가지고 대한다. 열일곱 새내기 선생님 앤에게서 배운다. 아니 세 띠 동갑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배운다. 그래서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2016년 7월 25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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