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만 정면으로 바라보기
[ 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 역사의아침 ]
덥다. 유난히 덥다. 하루에 책 100쪽 읽기도 힘들다. 가끔 집 앞 도서관으로 피신 가볼까 생각하다가도 눌러 앉아 ‘이깟 더위 하나쯤이야..’ 하고 오기고 버티는데 두 손 들었다. 그냥 더위와 타협하고 샤워에, 냉수에, 낮잠에, 그리고 간간히 독서하기로. 이럴 때는 좀 가벼운 책이 좋은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역사책일지라도 야사가 곁들인 책이 아니라 팩트를 중시하는 이덕일의 책일지니 한 쪽을 읽더라도 진지하게. 이덕일, 정통 사학(?. 주류 사학 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에서 한참 벗어났을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역사 이야기꾼이다. 이이화 선생같이 평생 주류에 몸담지 않았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귀 기울이는 것은 순전히 그의 '팩트‘ 때문이다.
우리 근대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응시하기에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열강에 휘둘리다 일제에 능멸당하고 급기야 망국, 36년의 유린된 역사는 아무래도 외면하고 싶은 암흑의 근대 100년이다. 저자는 여기에 주목한다. 우리가 외면하는 근대 100년의 모습에서 남북의 분단, 좌우의 대립 등 오늘의 우리 모습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주로 고대, 중세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근대는 역사 보다는 소설이나 르뽀 등 문학에 의존한 지식이 대부분이었기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고종의 재위 기간은? 무려 44년이다. 매국노 5명에게 망국의 책임을 다 씌우기에는 그는 너무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같은 시기 왕위에 올라 일본 근대화를 마무리한 메이지 천황에 비하면 너무 무기력하게 왕위에 있었다. 아관파천이나 헤이그 특사 파견 등은 일면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의 무지와 오판을 말해준다. 저자는 망국의 뿌리를 1623년 인조반정에서 찾는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그 후예인 노론이 조선을 시대착오적인 사회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외교를 숭명(崇明)에만 의존하고 양명학을 이단시하고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우물 안에 갇힐 동안 집권 세력은 왕을 독살하고 패권을 공고히 한다. 이들 노력 집권 세력이 나중에 나라를 팔아먹은 주역이 된다. 외세의 침략 없이 자국의 집권 세력이 국왕을 제치고 매국 협상을 진행하여 나라를 갖다 바치는 ‘어이없음’의 뒤에는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해줄 76명의 귀족 작위와 고액의 은사금이 있었다. 이완용은 매국 협상에서 퇴위후의 고종 황제의 명칭을 ‘대공’이라 하자고 하여, 민중의 분노를 걱정한 일본이 되려 ‘왕’으로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이 협상의 실무자는 ‘혈의 누’의 저자인 이인직이다.
나라가 망하게 한 대가로 76명은 후작, 백작, 자작의 작위를 받고 매국 경쟁을 한다. 일본 제국 의회의 승인 하에 책정된 은사금은 당시의 왕실과 노력 집권 세력, 그리고 지방의 양반들에게 지급된다. 이들에게는 망국의 아픔보다는 눈앞의 돈이 먼저였으나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소극적으로는 은사금을 거부한 양심적인 양반들부터 자결을 택한 의열지사들, 그리고 망명과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간 희망의 씨앗들이 있었다. 구례의 매천 황현은 독약을 마시고나서 몸에 퍼져가는 동안 자제들을 불러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이회영 6형제 일가는 전 재산 600억 원을 들고 만주로 망명한다. 그 돈이 독립군 양성과 민족사학 건설에 씌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들의 주장이 단순한 독립과 왕정의 복고가 아니라 공화정 등 근대화의 요구였다는 점이다. 노론에 의해 정체된 근대화가 망국으로 인해 진전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이렇게 해외와 국내 잔류를 선택한 이들의 지난한 항일투쟁이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안중근, 안창호, 이상설, 이동녕, 여운형, 이회영, 김좌진, 홍범도, 이승만, 이동휘, 김구 등 익히 들어 보았던 지사들이 풍찬노숙을 하면서 싸워가는 투쟁사이기도 하다. 저자의 전문 연구구분야가 [동북항일연군]이기에 어느 부분보다 소상한 자료와 정황으로 우리 민족의 총체적인 저항을 다룬다. 눈에 띄는 것은 강우규 의사인데 일본 총독 사이토 저격사건의 주역인 이분의 나이가 62세. 교과서 속 이름만 외우기에는 너무 미안했다. 이승만과 이동휘는 임시정부의 두 거두인데 민족주의자인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만 거주하며 그곳 주민들의 독립자금을 개인용도로 사용하다 탄핵을 당한다. 이동휘는 사회주의자로 레닌의 혁명자금을 역시 임시정부에 귀속시키지 않고 자파의 운영에 사용하다 불신임 당한다.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분열하고 대립하던 임정과 여러 독립단체들의 상황은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뉴라이트로 대변되는 이 땅의 우익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크게 이의를 달지 않거나 심지어는 찬동한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 했으니 그 공과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론과 다름 아니다. 저자는 그것의 허구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전근대적 지배기구인 헌병경찰제도는 조선인에게만 즉결심판권과 태형을 허용한다. 태형은 때리는 벌이다. 조선 민중의 대다수가 찬성해서 합병했다는 주장은 폭압에 의해서만 유지할 수 있는 헌병경찰제도가 그 허구를 증명한다. 동양척식회사를 세워 토지강탈을 대대적으로 실시한 경제 착취, 민족사학 1217곳 중 1175곳 강제 폐쇄, 유곽과 공창 도입으로 인한 문화 저질화, 정치단체의 해산, 민족 자본의 축출, 언론 탄압 등 일제의 전방위적인 탄압과 착취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언어도단임을 말한다.
무더위가 계속된다. 드디어 책을 덮는다.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본 근대사 100년은 고통스러웠지만, 가끔씩 궤변에 흔들리는 얕은 근대 인식이 조금이나마 탄탄해져 무엇보다 시원하다. 참고로 이완용이 받은 은사금은 15만원이다.(당시 쌀 한가마는 5원). 옛끼!
2012년 8월 2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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