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67나무-이순원

짱구쌤 2012. 12. 31. 09:30

 

 

나무는 아이들보다 빨리 자란다

[ 나무 / 이순원 / 뿔 ]

 

일요일 일직 근무가 남아 있던 십 수 년, 태풍이 몰아치던 날 교무실에서 바람 부는 운동장을 바라보는데, 십 수 미터의 포플러나무가 연달아 운동장으로 넘어지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키 큰 몇 그루가 넘어지는데 동백이나 벚나무 등은 멀쩡했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더니 ‘딱’이었다. 모처럼 멀리 여행 갔다 온 뒤는 몸도 조금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 절대 안정. 순천시에서 해마다 지정하는 올해의 도서에 선정된 바 있는 이 책은 그야 말로 건전 도서다. 일종의 디저트 책이랄까.

 

“얘야, 첫해의 꽃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단다. 그건 나무가 아니라 한해를 살다가는 꽃들의 세상에서나 있는 일이란다.” 백년간이나 고택의 정원을 지키는 할아버지 나무는 얼른 열매를 맺고 싶어하는 여덟살짜리 손자 나무에게 이렇게 타이른다. 두 나무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이 책은 이제 생명을 다해가는 고목이 어린 나무에게 전해주는 ‘나무로 사는 법’이다. 아니 나무처럼 사는 사람 이야기다. 열 세살에 결혼한 꼬마 신랑은 첫해 나온 밤 다섯말을 배고픔을 견디며까지 먹지 않고 묻어두었다가 이듬해 봄 민둥산에 심는다. 그리고 그중 가장 좋은 밤톨 하나는 그의 어린 신부를 위해 부엌가에 심는다. 늘 이 나무를 보며 풍요롭게 열릴 밤알을 보자며.

 

“너는 스스로 싹을 틔운 작은 나무란다.” 고목의 엄청난 밑둥과 탐스런 밤톨을 부러워하는 손자에게 또 할아버지의 격려가 이러진다. “나는 누군가 심어준 나무지만 너는 다르단다. 그러니 당당하고 의젓하거라.” 난 내내 이 책을 읽으며 ‘작은 학교’나 ‘새로운 학교’를 생각했다. 이식되지 않고 스스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는 나무 같은 학교. 책은 나무이야기가 많다. 봄을 맨 처음 여는 매화나무의 기상, 가장 늦게 피지만 튼실하고 무성한 대추나무, 꽃은 보잘 것 없지만 변함없이 풍성한 감나무, 흉년에는 더욱 많은 열매를 매다는 참나무, 종이가 열리는 닥나무.. 거기에 놀고 먹는 벌도 숲을 이루는 데는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가장 남는 이야기는 냉이꽃이다. 우아한 수선화에 비해 보잘 것 없이 발 밑에 핀 냉이꽃은 작은 나무의 조롱 대상이다. 수선화 옆에 피었다면 사람들 손에 뽑혀 버려졌을 거라고, 사람들이 떠난 농촌의 빈집은 우선 뜰부터 무성해진다. 귀화 식물은 버랭이나 개망초가 먼저 점령하고 뒤이어 쑥이나 억새들로 인해 말 그대로 쑥밭이 된다. 다 그렇게 자리를 내어 줄 때, 냉이는 끝까지 자리를 내주지 않는단다. 한 번 잡은 자리는 후대를 위해 양보하지 않고 버틴다는 냉이는 “나무나 풀을 모양만 보고 판단하지는 않는”단다.

 

모든 나무가 떡잎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지만 밤나무는 뿌리를 먼저 내리고 잎을 틔우기에 강인한 생명력인 거대한 뿌리를 갖는단다. 그 무시무시한 태풍 앞에 맥없이 무너져버린 포플러와는 달리 굳건한 뿌리로 버틴 나무들은 몸을 이리저리 태풍에 맡기며 여유 있게(때로는 가지 손상의 작은 피해) 위기를 넘긴다. 긴 겨울잠에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을 예감하는 고목은 손자 나무에게 당부한다. 나무의 보람은 열매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성한 잎과 굳건한 뿌리라고. 서둘지 말고 지금은 작은 것에 집중하라고.

 

순천은 도서관이 참 많은 도시이다. 이 책도 집 앞 호수도서관에서 아내가 빌린 책이다. 공원과 도서관이 많아 살기 좋은 도시로 곧잘 꼽히는데 어느 보도를 보니 [국제정원박람회] 관계로 도서관 관련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니 걱정이 앞선다. 올 4월 보궐선거가 치러지는 시장을 잘 뽑아야겠다.

2012. 1. 9.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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