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라면을 끓이며

짱구쌤 2015. 11. 28. 18:26

 

 

삶은 풍화이며 견딤이며 또 늙음이다

[라면을 끓이며 / 김훈 / 문학동네]

 

성형 천국

겨울의 초입에 아이들과 서울에 갔다. 몇 달 전부터 계획한 수학여행에 나는 투명인간처럼 따라만 다니면 되었다. 여자 아이들이 많은 우리 모둠은 명동, 이태원, 홍대, 신촌 거리를 쏘다녔고 어김없이 화장품과 팬시 가게에 들러 신중(?)한 쇼핑을 지켜봐야했다. 지하철은 훌륭한 이동 수단이었으며 그곳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성형을 권하는 광고였다. 삶이 사진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 책의 압권은 [라면을 끓이며]가 아니라 [여자 시리즈].

그림이 삶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삶보다 더 무거울 수는 없을 터이다. (중략) 하물며 여자의 여성성과 모성이 치러내야 하는 한평생의 생물학적 산전수전과 백병전 속에서 어찌 그림 속의 젖가슴이 온전하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삶은 풍화이며 견딤이며 또 늙음이다. 살아서 무엇을 이룬다는 일도 그 늙음과 견딤 속에서만 가능하다. 삶은 그림보다 무겁고, 그림보다 절박하고, 그림보다 힘들다. (p258)

 

구차하고 째째한, 그러나 명료한

그는 시대의 소명이니, 역사의 진리니, 인간의 존엄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가령 그가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방식도 그렇다. 아버지가 쥐어준 5만원을 주머니에 넣고 끝내 바다에서 발견된 아이의 그 젖은 돈을 이야기한다. 사용되지 못한 5만원은 그 어떤 헌사보다 가깝다. 24전 전승을 거둔 성웅 이순신보다 내일 싸움을 앞두고 악몽을 꾸며 뒤척이는 초로의 사내가 더욱 현실적이다. 무언가 특별한 의지와 대의가 아니면서도 삶에 묵묵히 뛰어드는 사람들을 기록한다. 구차하면서 쩨쩨하게 보이는 사람의 기록이 무엇보다 명료하다.

 

바람

그가 타는 자전거는 풍륜(風輪). 그의 글은 바람과 같다. 가을 날 뻥 뚫린 것 같은 스산함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들이 가을에는 더욱 확실하고 뚜렷해진다. 가을에는 바람이 불어서 먼 것들이 가까이 실려 온다. (중략) 겨울의 바람은 사람을 낮게 움츠리게 하지만 가을의 바람은 사람의 눈을 맑게 해서 세상을 보게끔 해준다. 가을의 바람은 세상을 스쳐서 소리를 끌어낼 뿐 아니라, 사람의 몸을 스쳐서 감추어진 소리를 끌어낸다. 그 소리 또한 바람이다. 몸속의 바람으로 관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호흡은 그래서 가을날 더욱 선명히 느껴진다. (p376)

 

손의 울음, 몸을 움직여 사는 사람

남자들 치고 손으로 만드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는 드물다. 손을 쓸 일이 점점 별로 없는 시대에 작가의 말처럼 손은 이제 백수(白手)’. 그래서 손의 울음을 들어보자고 한다. 라면을 끓이던, 자전거를 타던, 공사장에서 집짓는 것을 구경하던 작가는 늘 손을 이야기한다. 먹고 사는 것을 이만큼 자주, 자세히 이야기하는 작가는 없다. 김훈은 비록 글을 쓰는 작가이지만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경외하며 그 삶의 방식을 배우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신뢰하는 이유이다.

나에게도 그 구석기의 수컷 기질이 남아 있나보다. 나무를 자르고 칼로 새기는 일이 즐겁다. 빈 교실에서 조용히 나무판을 새기며 잃어버린 손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닉네임이 [몸을 움직여 사는 사람]을 알고 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부끄러움, 내 안에 있는

 

글쟁이 윤리 의식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불편했다. 작가는 이전에 출판된 세 권의 책에 나온 글과 몇 편의 글을 합쳐서 이 책을 펴낸다고 하면서 이 책의 출간으로, 앞에 적은 세 권의 책과 거기에 남은 글들을 모두 버린다.’ 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논문 표절과 같은 자기 복제인데 이리 뻔뻔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그간 중언부언한 것들과 함부로 내보낸 말과 글을 뉘우치는것이라 했지만 나에게는 그 말이 그 말이다. 난 김훈의 글을 좋아한다. 뻔한 표현보다는 간명하지만 깊이 있는 글, 잽 날리듯 가볍게 뻗는 그의 글은 80년대 전설의 복서 슈거레이 레너드의 발놀림처럼 경쾌하다. 하지만 그가 지금도 연필과 지우개로 원고지의 빈칸을 채우는 글감옥을 성실하게 사는 작가라면 쉬운 길보다 의미 있는 길을 걸어주길 바란다. 김훈의 글을 읽으면 접히고 밑줄 긋는 곳이 많다. ‘치며 놀라다가 !’ 하고 탄식한다. 결코 오르지 못할 산 같은 막막함. 그래서 그의 글을 중독성이 강하다. 그는 밥벌이의 존엄을 이야기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글쟁이다.

20151128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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