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빨간 머리앤 / 루시 모드 몽고메리 / 인디고]
집단적 트라우마
뭘 해도 신이 안 나는 무기력에 때 아닌 여름 감기가 덮쳤다. 몸과 마음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기에 링거 같은 책이 보고 싶었다. 정여울 작가의 책에서 본 [빨간 머리 앤] 이야기가 그리웠다. 앞뒤 거세된 무식하고 용감한 아이들 명작 소설 말고 가능하면 원작에 충실한 책을 골랐다.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내용은 충실했고 삽화는 아름다웠다. 아직도 진도 앞바다의 아비귀환은 진행형이지만 일상의 평화로 돌아올 수 있는 끈 하나를 어렵게 붙잡게 된 것이다.
낯선 존재를 두려움 없이 사랑하는 법
정여울 작가는 앤이 아닌 마릴라와 매슈의 이방인에 대한 사랑에 주목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늙은 남매가, 잘못 입양된 주근깨 말라깽이 수다쟁이 소녀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사랑해 가는 과정은 이 작품을 풍부하게 읽히게 한다. 표현에 서툴고 무뚝뚝한 노처녀 마릴라가 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장면과 평생을 외로움에 익숙해진 매슈가 앤 때문에 삶의 에너지를 찾았다가 아쉽게 운명하는 장면은 참 아름답다. 자연의 포근함과 자연스러움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캐나다는 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참 훌륭하다. 말괄량이 삐삐의 고향 스웨덴처럼, 프린스애드워드 섬도 앤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앤이 그곳의 자연과 사람들을 알아가면서 놀라워하는 말들은 이 책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매슈가 치유 받았다는 앤의 쉴 새 없는 수다 말이다.
가장 좋은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열 입곱 눈부신 청춘들이 가장 빛나야할 순간을 뒤로하고 멀리 떠나갔다. 생때같은 자식들을 가슴에 묻는 부모들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것을 가장 아파했다. 열 살에 초록 지붕 집에(이 책의 원작은 초록지붕의 앤) 와서 열일곱의 앤이 될 때까지 따뜻하게 살펴주었던 가장 든든한 보호자 매슈는 “늘 내게는 네가 빛나는 순간이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다. 생전 처음 도회지로 나가 휘황찬란한 것들을 경험하고 돌아온 앤은 “내겐 획기적인 일이었어요.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라며 일상의 복귀를 행복해한다. 수만의 마음들이 그들의 귀환을 바랐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를.. 우리들의 바램은 이뤄지지 못했다.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이 평범한 사실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
좋은 분들이 곁에 있으니 전 훌륭하게 자랄 거예요
덜렁대는 사고뭉치 앤이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해주는 것은 ‘꾸밈없는 진실’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참견쟁이 린드부인, 늘 고춧가루를 뿌리는 반 친구, 지루한 목사님, 깐깐한 백만장자 할머니 등 만나는 모든 이들을 진실로 대한다. 좋게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좋은 분들이 옆에 있으니 전 훌륭하게 자랄 거예요.”거짓말처럼 앤의 행복한 바이러스가 마을에 퍼지고 갖은 고생을 거듭하던 앤에게도 좋은 시절이 온다.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그토록 의지했던 매슈 아저씨가 갑자기 그녀 곁을 떠나고 꿈을 키웠던 초록지붕집이 팔릴 위기에 처했을 때 앤은 독백처럼 내뱉는다. ‘길은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반듯해 보이는 길의 어디쯤에 있는 모퉁이는 두려움도 주지만 설렘도 준다. 그곳을 돌아서면 무엇이 있을까?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릴까? 우리의 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며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수십 년이 지나도 앤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앤처럼 아리따운 아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아니 그렇게 무미건조한 말로는 부족하다. 모퉁이를 돌아 길의 저편을 보지도 못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부디 아름다운 길모퉁이를 여러 굽이 돌아 삶의 참맛을 느껴보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4년 4월 25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