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68남자의 물건-김정운

짱구쌤 2012. 12. 31. 09:36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정확하다

[ 남자의 물건 / 김정운 / 21세기북스 ]

 

이순신의 위대함은 23전 23승이 아니라 기록의 철저함이라고 믿기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가 여간 반갑지 않다. 그는 늘 기록하기에 초등학생 때부터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껏 전혀 변하지 않는 일관성을 보여주는데 심리학을 전공한 저자로서는 무척 당황스럽다. 그는 그렇게 길러진 기록의 철저함으로 인해 팩트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자로 대성(? 노동운동가에서 극우정치가로의 변신)을 하는데 문제는 그것의 맹신이 가져오는 오버다. 하여 우리가 이만큼 잘살게 된 것이 다 ‘이승만’과 ‘박정희’ 덕이니 광화문 광장에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목청을 외치게 된다. 그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다. 거두절미하고 그의 기록에 대한 신념만 존경하기로 했다.

 

멋지고 세련된 외모의 저자는 명지대 [여러가지문제연구소]를 맡고 있는 김정운 교수이다.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남자들의 애장품(물건)을 보여주며 그들이 삶을 대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도발적인 제목만큼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흥미롭다. 저자는 동갑내기 친구들 중 가장 젊고 세련된 자신이 대견하다. 그렇게 된 사연은 파마 덕분이라고 말한다. 숱 적은 머리를 가리려고 한 파마는 저자의 일상을 상당히 변화시킨다. 우선 그에 걸 맞는 옷차림 때문에 과감함 의상도 입게 되고, 의상이 바꾸기 되니 취미도 만나는 친구도.... 결국은 생각까지도 바뀌더라는 것이다. 결론은 디테일, 좀 더 감각적이고 사소한 것을 지금 바꿔보라고 주문한다.

 

이어령의 책상, 신영복의 벼루,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 문재인의 바둑판, 안성기의 스케치북, 조영남의 안경, 김문수의 수첩, 유영구의 지도, 이왈종의 면도기, 박범신의 목각 수납통을 소개하고 인터뷰한다. 대부분 아는 사람이었는데 유영구는 명지대 이사장, 이왈종은 화가라는 것을 이 책으로 알았다. 그 외에도 저자의 만년필, 시인 깁갑수의 커피 그라인더, 사진가 윤광준의 모자가 소개되었는데 가장 관심이 갔던 것은 위의 김문수와 차범근의 달걀 받침대이다.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축구 영웅 차범근은 우리 또래 남자들의 우상이었다. 남성다움의 전설인 그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 고작 달걀받침대라니? 소주잔처럼 생긴 이 작은 물건을 지난 터키 여행 때 본 적이 있다. 식탁 위의 그것 용도를 몰라 옆 테이블을 훔쳐보는데 계란을 얹어 놓고 티스푼으로 파먹는 아저씨를 보고 픽 웃었다. 너무 귀여워서. 차범근은 독일 생활에서 익숙해진 이 물건이 일상의 소소함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것이어서 좋아한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빵집에 달려가 갓 구운 보리빵을 사고 타이머로 3분간 끓여 익힌 삶은 달걀을 이 그릇에 담아 두면 아침 식사 준비 끝. 어렵게 일어난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 앉아 꿀을 바른 보리빵과 적당히 익은 달걀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의 시간이 UEFA 두번 우승이나 챔피언스 리그 석권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살아보니 다시 오지 않은 그 시간이 소중했다고. 순수하고 진실한 남자 차범근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장규의 물건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일관되게 해온 일이 기록이니 스무 권의 학급신문 [어깨동무]와 백 몇 편의 학급신문과 학급일기 정도. 김문수 지사의 주장처럼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더 정확함을 믿기에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이제 그만두면 너무 아깝잖아! 오기로..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기에 저자는 “시간이 미쳤다”라고 했다. 시간이 빠르다고 느끼는 것은 기억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뻔한 일상의 반복으로 기억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가슴 뛰고 설레는 일을 시작하라고 부추긴다. 인생과 우주 전체에 대한 추상적인 계획 말고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무엇, 가령 이어폰 끼고 학교까지 땀나게 걸어가 보기, 미술관에서 반나절 혼자 감상하기, 기차 타고 멀리 다녀오기, 파마하기 등 삶의 구체적 마디를 만들 때라고 충고한다, 특히 남의 말 듣기 싫어하고 지나간 과거만 녹음기처럼 이야기하는 한국의 중년 남자들에게. 용기는 자신에 대한 신념과 자기실력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두 가지를 고민 중이다. 파마와 달걀받침대. 생각하면 설레기도 하니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2012. 4. 14.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