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책 한 권 마주하지 못하고, 뭔 쯧쯧
지독한 사람, 한강
“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작가의 인터뷰는 뻔하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이 문장은 특별했다. 자신은 쓰는 사람이지만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그래서 아직 읽히기를 기다리는 많은 책이 꽂혀있는 서재를 사랑한다고 했다. 이 책은, 나 역시 무척 사랑하는 내 서재에서 무려 9년간이나 읽히기를 거부당하다가, 노벨상이라는 무게에 놀라 허겁지겁 꺼내어 2주의 사투 끝에 마침내 읽게 되었다. [채식주의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접했지만 읽기가 무척 어려웠던 그 책의 여파에 광주를 다루고 있다는 사전 정보가 겹쳐 늘 책꽂이에만 꽂혀있었다.
작가는 지독한 사람이다.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아 읽고 나니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고, 일상의 평온함이 다소 불편해질 즈음 글을 썼을 것이다. 소년인 ‘너’가 말하지만 그것은 작가이고, 어느새 내가 되어있었다. 중흥동 옛집 마당에서부터 상무관과 도청, 그리고 어느 암매장 장소에까지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나를 끌고 다녔다. 드라마 속 작은 다툼과 갈등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나를, 하여 고교·대학 시절 금남로에서 열린 5월 사진전이나 자료 전시회를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겁쟁이 나를, 응시해야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소년 ‘너’를 통해 말하고 있었다.
그해, 동운동 이층집
1980년 5월, 나는 전남 광주시 동운동에 살고 있었다. 집 앞에서 19번 만원 버스를 타면 무등경기장과 일신방직, 금남로와 도청을 지나 산수동까지 1시간을 시달려야 산수국민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옛동무들과 살던 곳을 잊을 수 없어(사실은 전학이 두려워서) 그 먼 거리를 홀로 통학하였다. 6학년 그 시절, 10일 넘게 학교를 가지 않아 좋았던 며칠, 처음 보는 태극기 덮인 핏기 없는 맨발을 보았던 때의 공포, 트럭 위에서 형들이 던져준 카스텔라 빵의 달콤한 맛, 시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친구들과 신역까지 걸어갔던 용기가 혼재되어 가물거린다. 가끔 들리는 총소리에 저녁이 되면 창에 솜이불을 걸었던 아버지의 다급함이나, 고3이던 형이 집을 나가 트럭 타서 돌아다니다 집에 올 때까지 애태우던 어머니의 얼굴, 그래서 두 분이 형을 찾으려고 도청까지 걸어갔다 왔다는 이야기들이 조각조각 선명하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간 이 책을 읽지 않은 이유를 변명하게 해줄 만큼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은 성장통처럼 뒤늦게라도 지나야 하는 의례임을 잊지 않는다. 이제 그의 작품을 따라 제주를 건널 것이고, 그러면 조금 더 번듯한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고작 책 한 권 읽었으되
저자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아차 싶었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 냄비처럼 책을 읽고 덮으며 대단한 작가가 나타났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거기까지였고, 이 책은 기약없이 책장에 머물렀으니. 그러다 노벨상위원회에서 그의 이름을 호명하자 그때서야 ‘아 그랬었지’로 뒷북을 친다. 난 요 몇 년 동안 해당 연도의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사서 읽고 있는 중이지만 정작 내 나라 작가의 작품은 간헐적이고 편파적이었다. 상이 부여한 권위에 눌려 뒤늦은 미안함과 멋쩍음을 실토한다.
작가의 인터뷰 기사와 지나간 영상을 훑어보았다. 원래 진득한 사람이었고 그것은 위대한 상을 수상한 지금도 변함이 없는 듯 했다. 세계가 전쟁 중인데 무슨 잔치냐며 여러 호들갑을 물리친 것은 수상만큼이나 멋져 보였다. 그가 살았던 빛고을의 여러 지명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곳이어서-가령 효동국교, 중흥동, 호전 부근 등-반가웠고, 그가 재미있게 읽었다는 임철우의 「등대」-내 어릴 적 살았던 계림동 늴리리 동네 인근이 배경인-는 유년 시절의 겹쳐진 추억에 아릿했다. 무엇보다 그와 우리가 공유하는 시대의 아픔이 모두에게 공감되는 문학적 언어로 읽힐 것이 고맙다. 그래서 아이들과 엊그제 다녀온 광주 전일빌딩 외벽에 걸린 “한강! 고맙다! 기쁘다!, 5월 이제는 세계정신!”현수막 문구가 내 마음 같다. 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내년 봄에 나온다고 한다. 생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작가도 우리도 소년의 손에 이끌려 더 밝은 쪽으로 꽃피는 쪽으로 나아가기를.. 한강이 온다.
2024년 10월 23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