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54호밀밭의 파수꾼-샐린저

짱구쌤 2012. 12. 30. 22:54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호밀밭의 파수꾼 / J.D. 샐린저 / 문예출판사 ]

 

순전히 착각 때문에 다시 읽은 책이다. 지난번 읽은 [완득이]를 [호밀밭의 파수꾼]에 버금가는 성장소설이라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사실 이 소설이 아니라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서가를 뒤져 다시 읽어보니 생전 처음 읽은 듯 낯선 소설이었다. 기억력 감퇴에 착각이라니.. 때로는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이 뜻하지 않은 좋은 일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이 그러하다. 덕분에 좋은 책을 다시 읽게 되었으니 말이다. 난 어지간해서는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법이 없는데 어쩔 수 없는 뇌 기능의 퇴화로 요즘은 스치다가 본 서가의 제목 중 ‘저 책 내용이 뭐였더라?’하면서 다시 본 책이 상당하다. 좋은 책은 다시 봐도 새로 본 듯  하다. 좋은 옷이 그러하듯.


 

저자 샐린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 불리는 이 책의 주인공은 열 다섯살 고등학생 홀든이다. 세상의 기만과 허위에 환멸을 느끼는 이 부적응아 홀든이 학교를 떠나 방황하는 뉴욕에서의 3일간이 이 책의 배경이다. 따분하고 기만적인 수업, 말초적이며 이기적인 친구들, 가식적인 학교에서 쫓겨난(아니 나온) 홀든은 집이 있는 뉴욕으로 가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배회한다. 옛 여자 친구와 거리의 여자, 택시 기사와 피아니스트, 수녀와 옛 스승을 만나지만 사회와 불화하는 이 젊은 영혼이 머무를 곳은 어디에도 없다. 술과 섹스 등 우리와는 너무 다른 문화에서 오는 이질감이 작품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 시절 누구나 경험했을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반항, 순수한 것에 대한 동경, 자기 정체성의 혼란은 백분 공감이 간다.

많은 이들이 현대 소설의 명작이라 부르는 이유를 딱히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정직한 태도, 있는 그대로의 투영은 용기 있는 작가의 좋은 작품이라 부를 만 했다. 소년의 눈을 통해 작가는 위선에 찬 어른들의 세상을 조롱한다. 온 몸과 마음으로 호흡하는 순결한 청춘이 겪는 성장의 아픔은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우리에게(아니 나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당신의 위선은 무죄인가?”


사리지 않는 거친 표현과 소년답지 않은 경험의 묘사는 미국에서도 꽤 논란이 되었다 한다. [완득이]는 좋은 소설이지만 아이들이 읽기에는 몇 가지 주의가 필요한 것처럼 주제와 관점에 집중하면 이 소설은 생각거리가 많다.

방황하는 홀든의 마지막 안식처는 동생 피비다. 가식 없이 사람을 대하고 진정으로 상대에 공감해 주는 피비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될 오빠 홀든을 붙잡는다. 그 순수함과 “제발”로. 피비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착하고 예쁘다는 홀든의 독백은 이 책의 또 다른 주제 의식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있으랴             -도종환


어릴 적 크게 방황하지 않고 보낸 나는 사춘기를 나눠서 경험하고 있다. 30년째.. 그래서 많은 피비들과 매일 만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참 다행이다.

2011. 10. 10.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