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시간을 견딘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우리나라에도 강력한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저자의 글은 두 편 밖에 읽지 않았으니 그를 논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나에게는 그냥 베스트셀러 작가 ‘하루키’인데, 신문에 실린 그의 글을 보고 고른 책이다.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적잖게 공감이 되었다.
1. 끈기를 가지고 우직하게
2. 나만의 생각이 있어야
3. 피지컬이 뒷받침되어야
최고 인기 작가의 특별한 비법을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스러웠겠지만 솔직한 다기 고백으로 들린다. 평론가들의 찬사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글을 꾸준히 써 내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두 편의 센세이션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35년 간의 지속은 아무나 할 수는 없다. 조정래 작가처럼 스스로를 ‘글감옥’에 가두고(하루키의 다른 점은 비교적 즐기고 있다는 것) 매일 한 시간의 달리기로 체력을 유지한다. 지금도 일 년에 한 차례씩 풀코스 마라톤을 뛴다니 보통 사람은 아니다.
One day at a time
아니, 사실 그는 보통 사람이다.
평온한 교외 주택가에 거주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전한 생활을 하고 날마다 조깅을 거르지 않고 야채샐러드 요리를 좋아하며 서재에 틀어 박혀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는 작가라니, 그런 건 실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게 아닐까? 나는 세상 사람들이 품고 있는 로망에 쓸데없이 찬물을 끼얹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192쪽)
하루 하루, 200자 원고지 20쪽 정도를 다섯 시간 정도에 걸쳐 쓰면서 6개월에 장편 한 권을 완성한다. 소설가를 괴짜 기인으로 알고 있었거니와, 며칠씩 틀어박혀 벼락처럼 써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다. 우리랑 같이 생각하고 호흡한다. 그래서 그의 글에 믿음이 간다.
고쳐 쓰기부터 진짜 시작
내가 이 책에서 찾은 소설 쓰기의 비법은 ‘고쳐 쓰기’이다. 직업으로서 소설가답게 규칙적인 글쓰기로 초고가 완성되면 그때부터는 기나긴 고쳐 쓰기가 기다린다. 총 세 번의 과정을 반복하는데, 집중해서 훑어보다가 시간을 두고 낯설게 보기를 한다. 그렇게 최적의 글이 고쳐지면 아내의 감수가 이어진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아내의 지적을 전면 수용한다는 것이다. 지적대로는 아니지만 그 부분을 어떤 식으로는 고쳐 쓰고, 편집자에게 넘겨져 최종 수정을 거친 후에야 한 편이 완성된다. 그는 이 과정을 소설 쓰는 것만큼 즐기며 기꺼이 자신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프로중의 프로다. 일전에 국립생태원 최재천 원장도 강연을 통해 좋은 글의 원천으로 고쳐 쓰기를 꼽았다. 리듬을 타면서 무리 없는 글, 아내에게 보여준다는 점까지 똑같다. 이번 방학 때 그간 써온 글들을 천천히 고쳐볼 생각이다.
균형 감각
저자는 학교와 교사를 이야기했다. 주로 별 의미 없었던 학창시절을 회고하는 글인데, 흥미로웠던 것은 교사의 균형감각에 대한 생각이다. 예전처럼 사회전체가 역동성이 있을 때에야 학교가 조금 허술하더라도 그것을 덮으며 나아갈 수 있었는데, 지금처럼 ‘도망칠 곳이 부족한’사회에서는 학교가 ‘개인 회복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성에 주목하고 자존감을 길러주기 위해서 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균형 감각이다.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균형감각, 나이 들어가며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 하루키의 균형감은 상당히 뛰어나지만 일본인들 다수가 그런 것처럼(물론 우리도) 미국에 대한 입장은 좀 편향되어 있는 듯하다. 일본의 문학상의 허상을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 잡지 [뉴요커]의 작품 게제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였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시간을 견딘다
35년 꾸준히 소설을 쓰는 자신이 놀랍다고 한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시간을 견디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디 소설가뿐이랴? 나도 25년을 견디며 살고 있다. 그 자체가 놀라움이다.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못한 사람이지만 묘한 동지의식이 생긴다.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중단 없이 자신을 다그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人生到處有上手
견디다보니 방학이 코앞이다.
2016년 7월 11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