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書三讀. 책은 세 번 읽어야 한다
[처음처럼 / 신영복 / 돌베개]
저자의 말씀처럼 책은 세 번 읽어야 한다. 우리말이 줄 수 있는 가장 정갈하고 분명한 텍스트를 먼저 읽고, 그 글과 한 치도 다르지 않는 저자 신영복님을 읽고 나면 마지막은 나만 남는다. 나의 경험과 현재, 그리고 나를 둘러싼 관계까지 읽게 되면 창백하게 남을 뻔한 글들은 실천의 무기가 된다. 저자의 책은 빠짐없이 읽었지만 이 책에는 새로운 그림과 글이 많이 추가되었다. 영상으로만 접했던 강연 자료들이다. 반갑고 귀하다.
공부는 망치로 해야한다는 말은 기존의 관성과 관념을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나에게는 문신이 그렇다.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누군가의 문신이, 실상은 애벌레가 그들의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안상문(眼狀紋)처럼 무력하기 그지없는 약자들의 보호색이다. 다소 거칠고 폭력적인 아이들도 보호색으로 자신을 지키는 애벌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참스승 존 키팅 선생이 떠나는 마지막 길을 아이들은 책상위에서 배웅한다. 그에게 배웠던 것은 책상의 규격화된 파편적 지식이나 당연시되는 이데올로기를 넘어 더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보는 변화와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아쉽게 떠나는 교단이었지만 수많은 키팅 선생들이 그의 뒤를 따라 배움 너머를 가르치고 있다.
그림자를 추월하려는 가망 없는 질주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는 속도와 경쟁은 절망을 동반한다. 결코 추월할 수 없는 그림자처럼 가망 없는 질주를 계속하는 것이다. 학교가 가망 없는 질주를 멈추면 협력과 배움이 싹틀 수 있다. 경쟁 상대가 있다면 ‘어제의 나’하나로 족하다.
발상의 전환? 생명 파괴?
콜럼부스가 ‘발상의 전환’을 통해 달걀을 깨트려 세운 이래 세상은 깨뜨리고 부수는 발상만이 승리자로 기억되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달걀을 세우지 않은 것은 살아있는 생명을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상식은 애써 무시되었다. 그가 발견한 것이 신대륙이 아니었듯 그가 한 행동 또한 발상의 전환은 못되었다.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이야기해야 한다.
작은 기쁨과 우연 만들기
큰 슬픔을 이기기 위해서 반드시 큰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상의 작은 기쁨이 때로는 헤아릴 수 없는 큰 슬픔을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하여 우리는 수많은 작은 기쁨과 우연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행복했던 기억은 내내 우리를 지탱하게 해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2015년의 행복한 기억은 매일했던 수많은 수업 시간의 작은 웃음들이다.
올해 맡은 6학년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였다. 아픈 기억과 채워야 할 사랑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그런 조건에서 학교에 나오고 바르게 자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나를 숙여하게 한다. 그 아이들과 작은 기쁨, 수많은 우연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애쓸 것이다. 교실 전면 크게 걸린 우리 반 급훈은 [늘 처음처럼]이다.
2016년 3월 13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