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회 추억
저절로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청구회 추억 / 신영복 / 돌베개]
한발 더 나가지 못하고
영암의 작은 학교 덕진에 있을 때 일이다. IMF이후 도시에서 밀려나 아이들을 할머니 집에 맡기는 가정이 많이 생겼고 용*이도 그랬다. 키 작은 이 아이는 더욱 풀이 죽어 지냈었는데 담임인 나는 키 때문에 생긴 동지애를 발휘하여 각별하게 챙긴다고 챙겼다. 시력이 좋지 않은 용*이를 앞자리에 앉히고는 시력 검사 결과를 쪽지에 적어 가정으로 보냈다. “안경을 써야할 것 같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할머니가 제때 아이의 안경을 맞춰줄리 만무했지만 나는 거기까지가 내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용*이가 새 안경을 쓰고 밝게 웃으며 학교에 왔다. “할머니가 사주셨구나.” “아니요, 친구 **엄마가 사주셨어요.” “그래……” 전날 **집에 놀러온 용빈이를 보고 그냥 그길로 읍내로 나가 안경을 사주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참 부끄러웠다. 안경 하나 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폼은 다 잡고.
절망을 견디는 추억
저자가 스물여섯 한창 젊은 나이에 우연히 만난 여섯 명의 국민학생과 맺은 2년여의 인연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서오릉으로 소풍가는 가난한 아이들을 만나 한 번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인연이 그리 오래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을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로 대한 저자의 ‘품’ 때문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냥 만나 이야기하고 놀다가 책 한 권씩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매달 조금씩 돈을 모아(스스로 벌어서) 가는 과정은 참 흐뭇하고 아름답다. 그런 만남이 멈춘 것은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부터이다.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사형 선거를 받고 최종심을 기다리던 그 피 마르던 순간, 문득 정처 없이 장충체육관 앞으로 나와서 기다릴 아이들을 떠올리며 이글을 썼다고 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옥벽에 기대서서 그때의 추억을 써내려 갈 때에는 사형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추억이 주는 위안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추억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추억은 화석 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단히 성장하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나이가 들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경험, 폭넓은 독서, 다양한 만남이 쌓이면 모두가 어른이 될 거라고 믿었다. 저자가 아이들과 맺은 그 인연으로부터 인간과 세계를 이해해 가는 깊은 성찰을 읽으며 ‘스물여섯 어른’이 보였다. 아직도 좌충우돌하고 우물쭈물하는 자신을 보면서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여 누구에게나 겸손히 배워가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人生到處有上手(인생도처유상수)
아침 출근시간 라디오를 듣고 다니다가 요즘은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자주 듣는다. 그중에서도 선생님의 [여름징역] 낭독을 가장 좋아한다.
여름 징역살이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人性)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온다 하던 비 한 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老炎)도 더는 버티지 못할 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의 추량(秋涼)은 우리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 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秋水)처럼 정갈하고 냉철한 인식을 일깨워줄 것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1985.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