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 사회
우리 안의 독선
[독선사회 /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독립군, 강준만!
동료들과 한 달에 한 번하는 동아리는 새로운 활력을 준다. 지난달 첫모임을 한지공예로 정했을 때는 조금 의아해했지만 막상 함께 이야기하며 작품을 만들면서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다. 우리를 한지공예에 빠트린 강사선생님은 경상도에서 순천으로 살러온 분이다. 이유를 물으니 1995년에 나온 강준만의 [전라도 죽이기]를 읽고 고민한 결과라고 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가 지금껏 해온 일들이 지역주의, 연고·학벌주의, 독점언론, 미국편향 등 ‘우리 사회의 금기’에 대한 것들 아닌가? 그래서 나는 강준만을 우리 시대의 독립군이라 부르고 싶다. 상식과 염치를 되찾는 독립군.
2003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대의 금기와 불화하다보니 저절로 글은 전투적이며 공격적이 될 터, 강준만만큼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대척점에 선 인물도 드물다. 정치인, 학자, 문학가 등 좌우를 막론하고 그의 그물망을 빠져나가기 힘들다. 그런 그가 2003년 이후 스스로 변했다고 말한다. 어떤 계기를 통해 자신의 ‘독선적 글쓰기’를 멈추고 독선 사회를 멈추기 위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변화 이후 글은 조금 싱거워졌다. [김대중 죽이기], [노무현 죽이기]등 시대의 이슈메이커였던 때에 강준만의 글은 얼음물처럼 차갑고 명징했다. 지식인이라면 응당 그런 용기가 부러웠을 것이다. 거기에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성실함까지. 그의 힘을 빼고는 진보정권 탄생을 논하기 어려울 만큼 영향력 있는 글쟁이였다.
자기 확신을 의심하자
아무튼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아닌, 독선이다.” 그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진보에 대한 쓴 소리가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진보의 자폐증], [저주 마케팅] 등 그가 진보에 대해 하는 말들은 조금 심하다 할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난 그의 오랜 팬으로서 그 입장을 지지한다. 그는 일관된 잣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잣대는 좌우에게 고루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진보를 바라는 그의 진정성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진보 진영은 너무 정체되어 있으며 안이하다. ‘기필코’와 ‘결사’, ‘저들’과 ‘우리’, ‘정의’와 ‘역사’등 진보 진영이 사용하는 말에는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하다. 동시에 상대에 대한 배타성이 도를 넘는다. 민주노총의 오랜 정치방침이 특정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였는데 이것이 어떻게 추호의 의심도 없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나의 확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국회 내 최루탄과 대리 투표, 북의 3대 세습과 진영 간의 지나친 정파주의 등은 그간의 모호한 나의 확신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근거들이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한 하인리히 법칙의 여러 징후들이 일어났는데도 꿈쩍하지 않았으니 몰락할 수밖에. 한 개의 큰 사건 앞에는 작은 사건 29개, 사소한 징후 300개가 있었다는 1:29:300 법칙.
독일 축구대표팀의 다양성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이 우승한 원인은? 다양성과 통합의 결과! 그 팀에는 외칠, 포돌스키, 클로제, 보아텡, 케디 등 2명의 귀화자, 2명의 이민자 후손, 2명의 혼혈인이 있다. 게르만 순혈주의를 고집하지 않고 사회 통합을 진행한 결과라는 것이다. 유대인을 증오한 전 세대의 어리석음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엊그제 뉴스에서 접한 ‘독일의 시리아 난민 대규모 수용’도 그 연장선에 있다. 우리 반에 중국 아이 한명이 전학을 왔다. 2년 전에 같은 이유로 전학 온 한 친구가 그 아이의 통역을 자처하면서 우리 반은 이전보다 훨씬 폭넓은 시야로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다문화로 진입한 우리 사회가 그것을 사회 통합과 전진의 중요한 자산으로 이끌어 가기를 바래본다.
내 안의 독선을 경계한다
요 몇 년 사이 컨설팅과 강연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사람들 앞에 참 많이 섰다. 확신에 찬 강의는 듣는 사람에게 시원할 수는 있을지라도 맹신과 과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무엇보다 내 안의 허무함이 그것을 경계하게 한다. 확신에 찬 발언이 많을수록 헛헛해지는 그 무엇이 이제는 싫다. 고민을 나누고 지혜를 모으는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 내년부터는 최대한 자제할 생각이다. 남 앞에서 한 이야기가 나에게 족쇄가 될 수 있음이 두렵다. 내 안의 독선을 경계하는 일, 멋지게 나이 드는 길이다. 강준만 교수가 그래서 더욱 고맙다.
2015년 10월 20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