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다르게 사는 삶도 가능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 / 들녘]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남아 있는 부분은 아주 의미가 큽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 삶에 색깔을 입혀주고 멜로디를 주는 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따라 자기 삶이 만족스럽거나 진실하게 흘러가겠지요. 하지만 한 번 규정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을 관통할 수도 없고 그만큼 실망할 일도 드물지요.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면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할 수도 있고요. 이것들은 간혹 그들의 인생에서 극적인 형태로 돌출됩니다.”
-작가 인터뷰 중에서
지루함과 낯섦
스위스 베른의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는 칸트처럼 정확한 사람이다. 학생들에게는 존경받을지 몰라도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는 지루하다는 말을 듣는다. 아내는 그것을 이유로 곁을 떠났다. 비오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출근하던 차에 다리위에서 뛰어내리려는 한 여인을 구한 것이 그를 갑작스런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게 만든다. 우연히 손에 넣은 포르투갈 의사 프라두의 책 한 권을 쥐고 그의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전도유망한 판사의 아들 프라두(아마데우)는 필생의 친구 조르지를 만나 변치 않을 우정을 약속한다. 의사가 된 프라두는 독재의 하수인을 치료해 준 죄책감에 저항운동에 가담하고, 조르지의 연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파국으로 달려간다. 아마데우는 동맥류로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남겨진 이들은 이제 그들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내야 한다.
평생 고대어와 고전문학에만 파묻혀 산 그레고리우스가 좆는 프라두의 삶은 기실 그레고리우스의 다른 삶이다. 익숙한 것을 뿌리치고 나선 리스본행은 그에게 그간 선택해 보지 않은 삶을 생각하게 한다. 과거의 기억만을 붙들고 사는 사람(아드리아나, 조르지)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새 안경에 적응했듯 어느덧 리스본은 익숙해지고 돌아가야 할 베른이 낯설게 다가온다. 그레고리우스는 묻는다. ‘내가 아는 나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내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박범신의 [소금]와 영화
난 이 글을 읽으며 내내 소설 [소금]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평생 가장으로 충실했던 아버지가 사랑하는 막내딸 생일날에 집을 나가는 이야기는 앞의 소설과 겹쳐진다. 그 소설을 읽을 때에는 아버지의 일타로 인해 벌어지는 가족들의 고통 때문에 주인공과 일체가 쉽게 되지 않았는데 그레고리우스에게는 공감이 빨라 놀랐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삶에 대한 판타지가 지금을 살게 만드는 힘이라고 하였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며칠 전 서울행 기차를 탔었다. 기차는 세 시간 만에 전혀 다른 세상에 나를 내려놓았고 그곳에 오래 전에 와 본 것처럼 맘껏 쏘다녔다. 오래된 동네 부암동에 가서 전시회도 보고, 사람 구경 더 없이 좋은 건축박람회도 가고, 보고 싶던 콘서트에도 갔다. 혼자 밥 먹고, 가방도 사고 커피숍에서 책도 읽고 심야우등버스 타고 돌아온 하루의 일탈. 다른 것은 몰라도 나를 더 많이 생각하게 해준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책을 다 덮고 내친 김에 영화를 구해서 보았다. 영화는 소설에 충실하면서도 영화만의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레고리우스역을 맡은 주연배우(제러미 아이런스)의 깊은 연기력도 좋았지만 책에서 아쉬웠던 말미를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기차를 타려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안과 의사 마리에나는 묻는다.
“왜 여기에 머무르지 않으세요?”, “뭐라구요?”, “왜 여기에 머무르지 않으세요?”
기차는 그는 놔두고 떠날 것이다. 그에게 지루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해준 그녀 때문에 나는 안도했다.
2015년 1월 25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