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진보
‘품위 있는 진보’는 가능한가?
[싸가지 없는 진보 /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불편함과 후련함
지난 2012년 대선 방송 토론회에서 이정희 통진당 대표는 “당신을 떨어뜨리려고 이번 선거에 나왔다!”며 박근혜 후보를 겨냥하였다. 토론회 내내 박후보와 각을 세우며 욕설만 오고 가지 않았지 거의 인신공격성 포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전혀 부각되지 않은 채로 토론은 종료되었다. 난 그 시간 내내 불편했다. 문재인 후보가 가려진 것 때문이 아니고 진보의 품격에 대해 말이다. 토론이 끝나고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좀 심하다’와 ‘후련하다’가 반반이었다. 지역의 특성상 비난은 조금 적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고 들었다. 난 선거의 결과도 걱정스러웠지만 진보 세력이 처하게 될 자리와 체면 때문에 괴로웠다. 그런 방식밖에 없었을까? 우리가 가진 것이 그 것 뿐이었을까?
역시 강준만
‘김대중 죽이기’, ‘강남좌파’, ‘안철수 현상’ 등 우리 사회가 비켜가서는 안될 핵심의제를 찾아 이슈화 시키는데 탁월성을 발휘하는 이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전공자답게 대중과 소통하는 것에 항상 촉이 서있다. 이번에 들고 나온 진보의 싸가지 문제는 선거마다 패하는 ‘진부한 진보’에게 국민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듯 했다. “싸가지 결핍이 선거를 필패로 만든다”, “진보의 언어는 모욕과 쌍욕인가”, “왜 진보는 감정에 무능한가”를 여러 이론과 사례로 증명해 보인다. 보수 정권이 반복적인 헛발질로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도 민주당을 위시한 진보세력이 워낙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여 번번이 보수의 승리로 끝나는 선거를 보고 강준만의 돌직구가 나왔다. 진보는 싸가지가 없어서 지는 거라고. 태도도 아니고 싸가지라니? 우리 사회에서 싸가지는 여러 의미로 쓰이나, 될성부른 나무는 싹수만 봐도 안다는 그 싹수가 바로 싸가지다.
죄의식 마케팅
법학자 조국 교수가 사용한 이 말처럼 진보는 상대방보다 우월한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임하며 ‘나를 따르라!’를 외친다. 왠지 진보 측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면서 처음에는 미안해 하지만 익숙해지면 ‘당신들은 늘 옳은 말만 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모른 체 한다. 아니 오히려 짜증을 낸다. 자기감정에 몰입하여 대중의 반응에는 둔감해 진다. 비록 쇼일망정 ‘천막당사’나 ‘한 번 만 기회를 주십시오.’ ‘@@@대통령을 지켜주십시오.’ 같은 보수 측 구호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솔깃하다. ‘정권 심판’의 변종만으로 선거를 치르려는 무식한 뚝심은 멋있어 보이지도, 지혜로워 보이지도 않아 보인다.
나꼼수와 안철수
저자는 고정된 양측의 30%나 무관심 20% 말고, 부동층 20%가 승패를 가른다고 이야기한다. 그 20%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반응해 주는 측에 표를 던진다. [나꼼수]는 주류 언론에 대항하여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성공한 진보의 특별한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후련함과 동류의식을 주기도 했지만 반면에 보수나 부동층에는 그 태도로 인해 극렬한 반감과 거부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안철수는 두고 두고 아쉽다. 그가 잘하는 소통, 품위, 공감 대신 너무 쉽게 정치적 대응 방식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전화위복이 될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편을 나누고, 공격하고 반대하는 방식 말고 인정하고, 타협하고 제시하는 품격 있는 진보의 모습을 기대한다.
깰 수 없으면 타협하라
“변화가 없다면 진보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버나드 쇼가 했다는 이 말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귀를 열어 놓고 나머지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 진보의 ‘확증편향’은 싸가지 없는 진보의 맨얼굴이다. 우리는 올바른 역사의식과 대중을 신뢰하는 좋은 전통을 진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변화하려는 보수를 인정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쳐야 한다. 그게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 리영희 선생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품격 있는 진보적 지식인이 되자!
2014년 10월 27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