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의 행자
신발에 대한 경배
[ 신발의 행자 / 김경윤 / 문학들 ]
신발장 위에 늙은 신발들이 누워 있다
탁발승처럼 세상 곳곳을 찾아다니느라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들은 나의 부처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
저 신발들의 행장(行狀)을 생각하며, 나는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게 경배한다
신발이 끌고 다닌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
내가 평생 읽어야 할 경전이다
나를 가르친 저 낡은 신발들이 바로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이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바닥이다
이 세상에 와서 한평생을
누군가의 바닥으로 살아온 신발들
그 거룩한 생애에 경배하는
나는 신발의 행자(行者)다
[신발에 대한 경배] 전문
논리 정연하고 열정적이었다. 우리 교육의 현실을 간파하고 교육운동의 진로를 설파하는 모습에서 시인을 상상할 수는 없었다. 20년 전, 그를 만났다. 그리고 2007년 그의 고향에서 이 책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마음씨 좋은 웃음으로 우리 부부를 반겨주고, 그를 둘러싼 땅끝의 동료들이 함께한 자리는 내내 뭉클함이 있었다. 그의 시가 참 좋았다. 또 다른 그를 만난 것은 미황사였다. 부처님 오신날 찾아간 땅끝 아름다운 절집에서 불자들의 소원을 하늘에 걸어주는 일에 열심인 그와는 눈인사만 나눴지만 청명한 날 그는 거기에 참 자 어울렸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시어의 상당수는 달마산 작은 절집의 아득함에서 퍼올렸으리라.
김남주 시인의 시집을 간만에 읽고 자연스럽게 그의 시집을 빼들었다. 2007년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이 시집에는 김남주의 시와는 다른 느낌의 시들이 빼곡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김남주의 ‘노래’와 시인의 ‘경배’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혁명을 꿈꾸고 실천했던 김남주의 격정적인 무기와는 다르지만 닳고 닳아 헤진 신발로 써내려간 삶의 경전도 나에게는 든든한 무기가 된다. 그는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그가 수업 시간 백석의 ‘여승’을 읽어주다 시에 취해 눈앞이 흐려진 경험을 나도 가지고 있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이라는 책을 읽어주다 울컥해서 한참 쉬었다 읽었는데 나중에 열 살짜리 3학년 여자아이가 엄마한테 “짱구쌤이 책을 읽다 울먹이셨는데 나도 가슴이 아프더라” 라고 했단다. 내가 느껴야 아이들도 느낀다.
골목길까지 따라 나온 은숙이 어머니
“아그들 가르치느라고 고생이 많으실 텐디...”
말꼬리 잇지 못하고 하얀 내 손에 찹쌀 한 되박 쥐어준다
넥타이에 양복차람이 문득 낯설다
탱자울 너머 달마산 산빛이 뿌옇게 흐리다
[찹쌀 한 되박] 중
가정 방문 마지막 집에서 쥐어준 찹쌀 한 되박이 시인을 부끄럽게 했단다. 서너해 전, 섬마을 그 집도 나에게는 그랬다. 기구한 사연으로 2학년 증손주를 키우는 80대 노부부는 어렵게 찾아온 담임선상님께 까만 비닐봉지에 맥주 두병과 배 하나를 넣어 손에 들려주셨다. 소재지에 이따금 보건진료 받으러 나오시는 할아버지는 일부러 비탈길 걸어 학교에 오셔서 쓰루미와 매취순 한 병을 교실에 놓고 가신다. 힘들 때 한잔씩 하면서 가르치라고.. 시인은 수선화를 보기 전까지는 마음의 상처도 꽃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시를 쓰는 일과 가르치는 것이 다르지 않다.
나는 한 번도 한양의 불빛 그리워 한 적 없다
차라리 대흥사 노승이거나 동자승이 부러웠다
[공재화첩3-자화상] 중
그가 자주 가보는 녹우당에서 본 윤두서의 자화상은 참 강렬하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자존심과 당당함이다. 땅끝에서 태어나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이나 아버지의 손바닥 갑골문으로 길러진 시인이 그곳에 살면서 땅을 딛고 찬찬히 들여다보며 경배하는 것들을 수 백년 전 공재도 느꼈을 것이다. 쉬운 말로 한 평생을 누군가의 발바닥으로 살아온 신발들에 대한 그의 경배를 믿는다. 어디를 펼쳐도 깊은 울림을 주는 시집을 자주 꺼내 보는 이유다. 신발장에 있는 내 오래된 신발에 예쁜 꽃이라도 심어봐야겠다.
2014년 3월 23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