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112이방인-카뮈

짱구쌤 2013. 1. 27. 11:35

 

투명한 의식으로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

[ 이방인 / 알베르 카뮈 / 민음사 ]

 

책 읽어주는 라디오를 듣는다. EBS에서 종일 책읽기 방송을 하는데 엊그제 끝난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음에도 마지막 키팅 선생과의 이별 장면은 눈물이 나와서 혼이 났다. 읽어주는 성우 역시 울음을 참지 못한다. 방학 중에 들은 책 중 [위대한 게츠비]와 [이방인]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둘 다 다시 책을 구해 읽었다. 낭독과 다른 느낌이다. 어른이 읽는 동화, 수필, 단편, 장편, 여행기 등 시간대별로 여러 장르의 책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 읽어주는 것만으로 방송을 계속할 수 있다니.. 시청료가 아깝지 않았다. 많은 이들에게 청취를 권하고 싶다.

 

부조리(不條理) : 이치나 도리에 맞지 않음,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세계 속에 처하여 있는 인간의 절망적 한계 상황이나 조건

앞의 정의는 원래의 것이었으되 뒤의 풀이는 분명 카뮈의 ‘이방인’ 발간 이후 세워진 것이라 확신한다. 실존주의 작가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은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반복되던 일상이 갑자기 낯설어 지는 순간, 사물에 대해, 타인에 대해, 자신에 대해서도 낯섦을 느낄 때가 있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무관심이라 칭해지는 이 낯섦은 장례식 장에서도 이어지고 일상으로 돌아온 직장과 애인의 관계에서도 계속된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생활’, 무심한 일들의 연속이다. 어머니의 죽음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상에서 수영하고, 데이트하고, 잠자리하고, 술을 마시고 그러다가 아래층에 사는 비열한 이웃의 어떤 사건에 휘말리어 우연찮게 아랍인 청년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구속된다. 정당방위의 여부나 사건의 개연성, 사람들과의 복잡한 관계가 갑자기 싫어진 피의자 뫼르소는 모든 변호를 거부한다. 심지어는 “어머니의 죽음이 슬펐는가?”라는 에비 판사의 황당한 질문에도, 사실 이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조금은 친한 사람의 죽음을 원하는 경우도 있잖아요.”라며 무심하다. “왜 아랍인에게 권총을 다섯 발이나 발사하였는가?”, “햇빛이 너무 뜨거워서”-아랍인이 꺼내든 단도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때 그는 권총을 발사한다-

 

[러브 인 아시아]라는 다문화 가족 고향방문 TV프로그램은 볼 때마다 슬프다. 우리 사회의 이방인인 그들이 이 땅에서 겪는 아픔과 고통에 공감이 갔기 때문이리라. 철탑위에서 몇 달 째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나 자기 땅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다 참사한 용산의 넋과 제주 강정의 농투산이들 모두 이방인이다. 오랜 시간 함께한 모임에서 갑자기 이질감을 느꼈었다. 낯설었고 조금은 불편했다. 끼리 끼리의 동류의식과 폐쇄성이 수많은 이방인의 거처를 빼앗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뫼르소는 많은 이들의 무관심에 감사했다.

 

한 번도 흥분하지 않은 그가 딱 한 번 절규하는 장면이 있다. 공개 교수형이 결정되고, 사형수를 찾은 신부님의 설교(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다)가 시작될 때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 할 수 없다. 내 삶을 이해할 수도 없다. 누구나 죽게 되는 운명에서 당신의 신보다 내가 더 나의 운명을 확신한다.” 이방인의 자기 선언이다. 극단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방법(살인자의 존재 의식)은 얼핏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었을텐데도 작가의 의도는 분명하다. 부조리한 현실의 무의미함에 대해 끊임없이 반항하는 이방인의 삶. 뒤 이어 발표한 시지프스의 삶처럼 결코 포기하지 않은 삶, 열정을 최대한 지키면서 투명한 의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카뮈가 우리에게 말하는 인간의 길이다. 투명한 의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첨부파일 이방인.hwp

2013년 1월 27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