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110책바보 한창기-김윤정

짱구쌤 2013. 1. 22. 00:12

 

뿌리 깊은 나무

[ 책바보 한창기, 뿌리 깊은 나무가 되다 / 김윤정 / 청어람미디어 ]

 

고등학생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형은 LP판소리를 틀었다. 얼마동안은 아침의 고요를 방해하는 소리가 하필 고리타분한 국악인가를 원망했지만 어느 순간 제법 귀에 들어오게 된 레코드판은[뿌리깊은나무 판소리 다섯바탕] 전집이었다. 남다른 국악 애호가였던 형님 덕분에 귀를 틔일 수 있었다. 또한 이웃에 사시는 막내 외삼촌 집에서 자주 빌려오던 책이 있었는데 [한국의 재발견] 시리즈와 한창 지난 월간 잡지 [뿌리깊은나무]였으니 한창기 선생과의 인연은 비교적 오래 된 듯하다.

 

하나 한창기 선생이 그것을 발행한 장본이 이었음은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것은 낙압읍성 옆에 자리한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 다녀온 작년 봄이었으니 무지도 그만한 무지가 없다. 최초의 한글 전용 가로 쓰기 잡지인 [뿌리깊은나무]는 어린 당시에도 세련되고 기품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읽기 쉬운 우리말 편집이 인상 깊었다. 선생은 벌교 출신으로 평생을 우리문화 지킴이로 살았다. 서른 다섯 살에 브리테니커 한국지사장을 지내며 쌓은 재력으로 잡지를 창간하고 판소리 복원과 우리 문화재 수집에 힘을 쏟았다. 법대를 나왔으되 브리테니커를 넘어선 최고의 책을 만들고 싶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법관을 포기했으며 마침내 우리말 잡지의 전형을 보여주게 된다, 민초의 삶과 역동성을 알리던 소박한 잡지는 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해 강제 폐간 당한다. 몽매한 독재자는 문화에도 독이다.

 

간송 전형필, 일제에 침탈당한 우리 문화재를 다시 찾아오는데 모든 것을 바친 이 ‘민족자본가’가 없었다면 우리의 문화는 많이 허전했을 것이다. 한창기 선생 또한 그러하다. “세상에서 서기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 목소리 큰 사람이야 얼마든지 많은데 작은 것을 꼼꼼히 기록하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책바보 선생을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렇게 회상한다. “어떤 일이든 바보같이 사랑해야 천재보다 더 크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 봅니다.”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쉼터에서 이 어린이 책을 구입하였다. 둘째 주려고 산 책인데, 다 읽고 난 녀석이 이것 저것 물어봐서 할 수 없이 읽게 되었다. 읽기를 잘했다.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답고 거대한 책, 박물관”를 생전에는 짓지 못하다가 평생 모은 6500여점의 민속품과 문화재를 순천시가 기증받아 마침내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을 짓게 되었다. 경관상 지상으로 올리지 못하고 지하로 내려간 박물관은 작지만 알차며, 곁에 들어선 한옥은 오지도록 당당하고 기품 있다. 겨울철 오가는 사람을 위해 따뜻한 난방까지 해두었으니 간만에 만난 벗들과 따뜻한 정담을 오래도록 나눌 수 있었다. 한창기 선생의 유지를 살뜰하게 살피는 작은 배려가 고맙다.

 

이마적, ‘얼마에 가까운 얼마동안의 지난날’이란 뜻을 지닌 토박이말로 한창기 선생이 자주 사용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나니 이마적에 다시 박물관에 가서 차분하게 둘러보고 한옥 안채 따뜻한 방에서 좋은 책 읽고 와야겠다.

2013년 1월 21일 이장규